자기계발

대규모 사업에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갈등

뉴스레일 2022. 4. 7. 09:35

복잡한 탓에 문자 체계를 고안하는 과정에서 그 모든 소리를 나타 낼 수 있을 만큼의 많은 기호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캅카스와 에티오피아 양 쪽 지역의 문자들을 모두 취해야 했기 때문이고 동양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의 수도원은 언어 교류의 강력한 모체로 작용했다고 한다.

 

대규모 사업에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갈등

출처: 픽사

서로 동떨어진 국가의 학자들을 종교 문헌의 연구와 해석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규합하는 역할을 한 것이고 기독교 세력이 이교도 민족들로 확장됨에 따라 기독교는 이 교리가 다른 언어로 얼마나 제대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게 된고 이 대규모 사업에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갈등이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이교도들의 언어로 마음을 움직여 모든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것이 목표 인가 아니면 조심성 없이 이루어지는 무단의 해석으로 인해 신학 교리가 이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문서의 번역을 통제하는 것이 목표인가 세기에 모라비아 슬라브족 사회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하던 형제 키릴로스와 메 토디오스는 슬라브어로 종교 문헌들을 번역하기 위해 키릴 문자를 만들였는데 당시 이들은 비잔틴 제국의 중심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고위 성직자들의 강력한 의심과 반대를 감당해야 했으며 그런가 하면 콘스탄티노플 에 있던 범세계적 학자들은 두 사람의 작업 즉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는 낯 선 여러 슬라브어 소리까지 표현해내는 적절한 문자를 개발하는 작업에 도움을 주였는데 키릴로스와 메토디우스는 문법가 존이나 철학가 레온 등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아르메니아 학자들과 교류했고 초기 슬라브어의 일부 소리들을 나타내기 위해 아르메니아어 글자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고 세기 들어 아랍 세계를 배워나가는 데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기독교 가 지중해 지역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카탈루냐 학자 룰 니니는 개종을 위해서는 교회가 외국어 연구를 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는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그리고 년경 네덜란드 학자 에라스뮈스는 유럽에서 인문학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으며 그의 목표는 주요 종교 적 학술적 문서에 사용된 언어들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 문서들의 정확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는데 오스만 튀르크의 비잔틴 제국 정복 이후 이탈리 아와 여타 유럽 지역의 그리스 고전 학자들이 유입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 욱 고무되였는데 그러나 사실 선교에 기반한 미지 언어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뻗어가 식민 통치와 종교 전파에 착수하면서부터였고 때로는 과학적 호기심이 이 작 업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으며 스페인에 있어 년은 운명의 해라 할 만하고 그해에 스페인은 세 가 지 전환점을 맞게 된고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 고 유대인들이 모두 축출되었으며 네브리하가 스페인어 문법 서를 출간했으며 무려 세기 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만 경의를 표하던 유럽에서 최초로 등장한 현대 유럽어 문법 서고 흥미롭게도 이 세 가지 중대 사건 은 서로 연계되어 있고 레콘키스타나 이후에도 이슬람교도들과 유 대인들이 계속 잔존하면서 스페인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다언어 주의라는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라틴어 르네상스 이후 부활된 그리스어 외에 도 아랍어와 히브리어까지 유일신을 믿는 세 개 종교의 문필 전통이 혼합될 수 있였는데 그러나 년 이사벨 여왕의 무자비한 통치 아래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로 합병되었고 나아가 언어 역시 카스티야식 스페인어로 통합된고 네브리하가 새로이 문법서를 편찬한 바로 그 언어고 역사상의 시간 적 지체 현상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고 콜럼버스와 함께 항해했 던 학자들이란 바로 이보다 앞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에 성장한 이들이 었던 것이고 아마 어떤 유럽 국가도 그처럼 언어학적인 전문성을 대동했다고 합니다.

 

수 적으로 불리할 때

신 세계와 조우할 수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콜럼버스의 배에는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히의 후예들을 만날 것을 대비해 히브리어 학자와 칼데아 어학자들도 함께 타고 있였는데 새로운 식민지에 대한 스페인의 언어 정책은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다 수 적으로 불리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새로 접하게 되는 언어에 맞춰야 했으며 예를 들어 년 중앙아메리카의 유카탄 반도에는 마야인이 만 명가량 있었던 반면 스페인 사제는 명뿐이라 사제들이 마야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멕시코 아즈텍 지역의 인구분포도 정복자들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치 초기부터 아즈텍어 나우아 틀어라고도 한다를 뉴 스페인허의 행정 언어로 하는 정책이 시행되였는데 그러나 그곳에는 아스텍 족만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즈텍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다른 민 족도 많았고 그중에는 인구가 수백만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민족도 있였는데 그 결과 선교차 파견된 사제들은 현지 언어를 배우고 이를 토대로 교리문답서 고해성사서 사전 문법서를 편찬하고 성경을 번역하는 대대적인 프로그램에 착수하게 된고 이 어마어마한 언어학적 도전에 나선 스페인의 정책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년 멕시코에 인쇄소를 설립했고 그 후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타라스칸어 나우아 틀어 페루의 케추아어 나의 문 법서를 출판했으며 년까지 총 개 아메리카 원주민 허에 대한 문법 서가 출판되었는데 이 시기 모든 유럽어의 문법서가 개였던 것에 비하면 놀 라운 기록이다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어 문법서 중 개는 비슷한 수준의 영어 문법서보다도 시기상 앞선 다당 시 이루어졌던 스페인인들의 언어 기술은 흔히 라틴어 중심의 기술이라는 비판을 받곤 하는데 실제로 복잡한 아메리카 원주민어의 여러 양상이 이들의 기록에는 누락되어 있고 그러나 이들이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도 사실이고 이들은 새로운 음성 부호를 고안하는 한편 사동 응용 태이 명사 포합 등 당시만 해도 유럽의 학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문법 현 상을 발견해 설명했는데 이 개념들은 전 세계의 언어를 다루는 우리의 일반 적 개념 틀을 풍부하게 해 주였는데 신세계에서 열광적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람들의 언어학적 연구에서 두드러진 한 가지 특징이 있고 전혀 다른 이방인의 언어를 이해하고 기록하려 는 세계 최초의 체계적 시도였다는 점이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사아 군 은 틈라텔롤구의 기숙 학고 콜레히오 드 산 타크 루스를 맡고 있었다 그림 참조 이 기숙학교는 스페인 화 기독교화된 새로운 멕시코인 세대들을 문화 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였 는데 사아 군은 여기서 엘리트 소년들에게 기독교 기본 교리 읽기와 쓰기 라 틴어 수사학 논리학 철학 등을 가르쳤고 년에 사아 군은 다음과 같은 상부의 전달을 받게 된고 원주민 인디언 특히 멕시코 텍스코코 틀 릭스 칼라 지역 인디언의 옛 관습을 모아 책으로 내라 인디언들은 이 관습을 기억하고 았을 것이다 여타 사교도의 많은 것을 기록하고 기억에 남겼듯이 그중 사악한 것이나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반박하고 만약 선한 것 이 있다면 그것을 기록하라 이 같은 사아 군의 직무 지침은 당대의 이중적인 태도를 잘 드러내 준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관습 종교적이라고 합니다.

 

관행을 기술하고 기록하려는 의지

관행을 기술 하고 기록하려는 의지였다 실제로 사아 군 수도사는 그들의 신앙 체계를 보다 제 대로 이해하기 위해 아즈텍 수도사들과 함께 나우아 틀어로 진행하는 신학 토론 회를 마련했는데 흥미진진한 이들의 토론은 장엄한 운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음흉하고 파괴적인 측면도 함께 지니고 있였는데 밤이 되면 콜레히오의 수도사들은 피라미드 사원을 파괴하고 토착 종교의식을 방 그림 사아 군 수도사 해하는 데 학생들을 동원했다 수도사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학생들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였는데 그러기 위해 아즈텍 종교 하에서는 부 모가 그들을 종교의식의 제물로 내놓을 수도 있다고 아이들에게 강조하곤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에 역점을 두어 사아 군을 옹호할 수 도 있다 식민지 팽창과 강탈이라는 지난 세기의 비극적 역사 과정은 무수한 전통문화와 생명을 파괴하고 강탈했으며 멕시코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그러했 던 것처럼 혹은 더 심하게 세계 도처에서 파괴와 강탈 행위가 자행되였는데 하 지만 사아 군처럼 후대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기록해내려 애쓴 사람은 아무 도 없었는데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사아 군의 작업 진행 방식이었는데 그는 필사를 담당하는 수행원들과 라티노네콜레히오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을 그렇게 불 렀다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여행했으며 여행에서 만난 현지 부족장이나 지도 층에게 옛 관습이 그려진 그림들을 보여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들과 그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였는데 라티노들에게는 그 내용을 나우아 틀어로 기록하게 하고 그들과 함께 이를 다시 스페인어로 번역했으며 기록 작업을 하는 내내 사 아군은 온전히 자신이 가르친 멕시코인들의 도움만 받았을 뿐 스페인 사람을 연구 파트너로 고용한 적이 없었는데 수십 년 동안 애써 수집한 결과 사아 군 은뉴 스페인 문물에 관한 일반 역사라는 권의 대작을 만들어냈다 그림 참조 피렌체 고사본 자이라 고도 불리는 이 책은 사 실상 세계 최초의 민족지학 자료이자 오늘날 언어 기록화 작업에서 내세우는 포괄적인 텍스트 수집 면에 있어서도 최초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 책에는 한 문화의 음식 의복 축제 종교 결혼 중매 등 생활의 소소한 것까지 망라하여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멕시코 정복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설명도 담겨 있다 제권 처음부터 끝까지 해당 문화의 일원인 기록 수집가가 직접 자신들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으며 삽화도 풍성하게 들어가 있고 백과사전 차원의 방대한 어휘 영역을 다루고 있어 사아 군 자신도 이 기록을 해당 언어에서 의 미를 가진 단어들을 모두 수록한 저인망이라고 보았고 중요한 사실은 피렌체 고사본의 일부 제장이 책이 나우아 틀어로 먼저 기록되었고 이후에 스페인어 번역이 이루어졌다 는 점이고 전 세계 식민지 사회에서 그러했듯이 토착 언어와 토착 문화에 대해 부 분 적으로 이루어졌던 공식적인 포용 정책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종교 재판이 시 작되자 이러한 책들은 악마의 사역을 기술하는 것으로 간주되였는데 사아 군 은 적을 이기기 위해 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교도들의 기억 속에 남은 종교의식과 관행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사아 군의 작업은 이교도들에 게 자기네 방식대로 살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비쳤을 수도 있고 년에 사아 군의 저작은 몰수되었고 사아 군의 필사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도 중단돼 였는데 종교 재판의 화염에서 비껴갔다고 합니다.

 

 

피렌체에 남아 있던 사본 덕분에 이 저작 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였는데 오늘날 그의 저작이 피렌체 고사본이라고 불 리는 것은 이 때문이고 단어를 듣는다는 것 세계를 듣는다는 것 언어가 인간 마음의 거울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분석 해야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알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고 스페인과 있다고 한다.

 

출처: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